건축미론에 대한 이야기

“건축미론에 대한 이야기”





 

건축미론

이번 글은 “건축미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건축과 미(美)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에 대한 여러 고민과 논의가 있어 왔습니다.

이번 글을 통해서 한번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건축미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

 

공통의 언어를 찾아 내기 위하여

미와 예술은 인간 정신의 고도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미나 예술을 엄밀한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학문 분야의 개척은 가장 뒤쳐져 있습니다.
예술에 얽힌 비밀주의나 신비주의가 정당한 연구의 발전을 저해해왔던 것입니다.
대체로 미나 예술에 관한 설명이나 논의는 그 정확한 뜻을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사람들의 감상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 이야기한 이상 그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이해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면 이야기하는 그 자체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기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예술가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가 천재와 같은 인상을 심어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자기 주위에 될 수 있는 한 연막을 많이 쳐서 보통 사람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예술가가 가끔 불확실한 말을 하는 이유에는 그들의 독선적인 신비주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기에는 듣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세상에도 예술이라든가 예술가라는 것은 우리들 보통 사람이 사는 일상적인 세계와는 거리가 있는 어떤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술은 신비의 세계이며, 예술가의 언동이 신비의 베일에 싸일수록 고급이며, 매력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지금도 예술의 세계에서는 비밀주의 또는 신비주의가 상당히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어도 과연 괜찮은 것일까요? 회화나 문학의 영역에서는 그래도 상관 없을지도 모릅니다.
화가나 문학가의 일이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개인 작업이며, 협력자나 지지자와 협의하거나 토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고유의 세계를 자기의 의지와 능력만을 가지고 추구하고 전개해 가면 그만이며, 작품만이 자기표현의 전부이므로 자기의 작품을 해석하거나 변호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건축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건축가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먼저 무엇보다도 건축주와의 상담이 전제가 되며, 자기의 생각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리고 또 설계과정에서도 구조기술자나 다른 협력자와의 의견교환이 필요하며, 더욱이 시공단계에서는 시공기술자와의 협의가 필수적입니다.

즉 건축은 언제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때문에 언어에 의해서 자기의 의도와 생각을 정확히 전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 건축가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확실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전혀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적어도 상대에게 의사전달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선인과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20세기 전반의 건축계에서는 기능주의 사상이 널리 유행하였습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기능적인 것은 아름답다.”라는 이론입니다. 즉 실용적인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만을 생각하여 설계하면, 그 건물은 자연히 아름다워진다고 하는 생각이지요. 이것은 당시의 “새로운 건축”, 이른바 “Modern Architecture”의 기본이념으로 유포되어 당시 신선한 이론으로서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이 기능주의와 동일한 사고방식이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에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은 스승의 견해로서 “쇠똥 망태기도 그 역할에 알맞은 것이면 아름답고, 황금의 방패도 그 역할에 맞지 않으면 보기 흉하다”라는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사상은 기능주의와 거의 동일합니다. 만약 당시의 건축가가 미나 예술에 관한 예전의 견해에 조금이라도 주의하고 있었다면, 이처럼 과거에도 있었던 그릇된 견해를 새삼스럽게 들고나오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자신의 건축미론을 확립하기 위하여

장래 건축가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미와 예술에 관해서, 특히 건축의 미와 예술적인 면에 관해서 확실한 기본적 견해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건축은 다른 예술과는 달라서 미적인 목적 이외에 실용적인 목적을 동시에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되며, 또 고도의 기술적 수단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건축주에게는 실제 그 주택이 ‘전체로서’ 훌륭하며, ‘전반적으로’ 만족할 만한 것이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그러나 건축가나 기술자가 그러면 곤란합니다. 그들은 그 주택을 평면계획, 재료․구조, 미적(예술적) 가치, 경제성 등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하여 각 측면에 대해서 평가할 수 없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견해를 근거로 하여 새로운 건축미론이나 건축예술론을 확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과 미(美), 음악 건축의 상관 관계

철학

철학이라는 것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 학문 전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철학은 자연학, 논리학을 바탕으로 더 체계적으로 발전되어왔습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와 제논의 금욕주의등이 유행했을 때에는 윤리,정치상의 문제에 집중되어 미나 예술에 관한 언급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미에 관해서는 대부분 다른 문제에 관련해서 부수적으로 또는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미를 도덕적 가치에 부수하는 종속적인 가치로 간주하는 것이 고대의 일반적인 경향이었습니다.

고대 철학가들은 “이데아 ≥ 자연 〉화가” 순으로 미를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善=美 의 사상

실용성과 미의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고대에 있어서 실용성은 ‘선’의 개념에 결부된 형태로 논의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견해

인간의 신체나 인간이 사용하는 여러 가지 것들 모두 가장 유효하게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美이면서 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 독자적인 역할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져 있으면 물론이다. 그리고 황금의 방패도 역할에 맞지 않으면 추한 것이다.”

여기서 선과 미는 동일한 것이며, 또 실용적인 기능을 만족하는 것이 바로 미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선=미’ 혹은 ‘유용성=미’라고 보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견해

플라톤의 설은 신중하면서도 반성적입니다. 그것이 어울리는 경우에는 대상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어울리지 않을 경우에는 추하게 보입니다. “유용한 것은 아름답고 무용한 것은 추하다. 유익한 것이 미이며, 미는 선의 원인이다, 미라고 하는 것은 청각과 시각을 통해서 얻어지는 쾌락이다, 미는 난해하다”는 주장입니다. 또 적정성, 유용성, 유능성 등이 미의 원인이라는 설도 모두 ‘가소로운 것’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화가와 시인은 사회에 유해무익한 존재라고 하여 그들을 그의 이상국가에서 추방하고 있습니다. 회화나 시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의견의 근거가 이러한 예술을 ‘모방’ 즉 ‘흉내내기 위한 기술’로 파악한 데서 오고있다는 점입니다. 플라톤의 견해는 모사적 예술에 관한 당시의 소박한 상식을 전제로 한 논의에 지나지 않으며 본격적인 예술론이라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은 플라톤의 모방론에 대폭적으로 수정을 가한 것이지만, 플라톤과 비교해볼 때 현실적이며 별 무리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플라톤은 직선이나 원으로 구성되는 도형, 단일의 음, 색, 그리고 향기의 미에 대하여 논하고, 이것들은 회화와 같이 상대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 의해서’ 아름 다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모사한 회화가 아름다운 것은 모사된 자연이 원래 아름답기 때문이며, 회화 그 자체에 기인하는 미는 아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소위 빌어온 미입니다. 따라서 회화의 미는 ‘상대적’인 미입니다. 플라톤은 이러한 상대적인 미에 대립하는 절대적인 ‘그 자체에 의한 미’의 존재를 주장한 것입니다.

 

미와 건축에 대한 생각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진실에 가깝지 않은 그림은 인정할 수 없다”라며 공식적인 회화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플루타르쿠스는 “예술작품이 우리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름답기 때문이 아나라 비슷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구요.

이처럼 예술작품이 진짜같이 보이는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던 것을 그다지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는 취지입니다.

 

음악의 미에 관하여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은 음악 미의 근원이 이러한 비를 이루는 ‘수’ 그 자체의 신비적인 힘에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2는 공평을 의미하므로 정의는 2×2=4라는 수식으로 표시되며, 3은 남성, 2는 여성이므로 ‘결혼’은 2+3=5라는 수식으로 표시하였습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상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간단한 정수에 대한 신앙은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십서”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또 르네상스 건축가가 건축미의 원인도 음악과 같이 각부의 척도가 정수비를 이루는 데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건축미론에 대한 이야기 맺음말

대체로 인간의 미의식이나 미를 추구하는 인간행위인 예술에 진보나 발전이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각기 의견이 다릅니다. 예술에는 전개(development)는 있으나, 과학이나 기술에 있어서와 같은 진보(progress)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현재의 일반적인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미의식이나 예술 자체에는 진보가 없을지라도, 미의식이나 예술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에 진보가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우리 모두가 “건축과 미”에 대해 고민을 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건축미론에 대한 서적도 있으니 좀 더 알아보고 싶으면 책을 구입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네요^^